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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정보

익산의 대표적인 여행명소 익산국립박물관 방문과 전시 정보를 소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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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료 : 무료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문의 : 063)830-0900

익산은 백제의 새로운 도읍 또는 별도(別都)라고 묘사했습니다. 일찍이 고조선 준왕의 새로운 터전이었으며 마한의 중심지였습니다. 7세기 초 백제의 부흥을 꿈꾼 무왕이 부여를 떠나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자 한 곳이 익산이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익산에는 한나라의 도읍이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이 있는데요.

이와 관련이 깊은 왕궁리 유적, 제석사, 쌍릉, 미륵사 등 백제 후기 문화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해 방문해 보았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인데요. 2020년에 우리나라 13번째 국립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아래로 들어가도록 지어졌는데요.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을 가리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익산과 전북 서북부 지역에서 출토된 중요문화재가 있는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박물관 로비의 미륵사지 목탑 모형

국립익산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은 총 3개로 나뉘어 있는데요. 첫 번째 익산 백제, 두 번째 미륵사, 세 번째 역사 문화로 구성되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

7세기 초 백제 무왕은 부여를 떠니 익산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곳이 박물관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 유적입니다.

왕궁으로 격식과 규모를 갖춘 왕궁리 유적은 폭 3m,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의 직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유적입니다. 궁궐을 보호하기 위해 궁장(宮墻)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왕궁리유적 궁장은 동아시아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된 왕궁 담장인데요. 왕궁리 유적 궁장의 아래 폭이 3m이기 때문에 원래 높이는 6m에 달하고 여기에 기와지붕도 올렸겠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라진 돌담 윗부분은 판축설과 석축설이 있는데 판축설로 재현해 놓은 담장을 볼 수 있습니다.

[수부]가 새겨진 기와 유물은 익산이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익산 토성, 백제 왕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에서만 확인되었습니다.

 

왕궁리 서북편 일대에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든 전문 공방이 있었습니다. 불에 탄 흙, 노벽, 송풍관, 숫돌, 원재료, 정교한 금. 유리. 동제품, 수많은 도가니를 수습했는데요. 왕궁리 유적의 유리 제품은 녹색을 띱니다. 유리의 달인, 금은의 고수인 가장 우수한 이들만이 왕궁에서 근무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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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오층석탑에는 두 곳의 사리안치 공간이 있었습니다. 1층 지붕돌 위에 2개의 사리구멍을, 1층 기단 중앙 심주석 위에 3개의 사리 구멍을 뚫었습니다. 금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은 심주석 사리 구멍에서, 도금 은제 금강경판 등 나머지 사리장엄구는 지붕돌 사리 구멍에서 수습했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동쪽으로 1.2km 거리에 백제는 왕실 사원인 제석사를 두었는데요. 왕실 내불당, 호국사찰,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정신적 바탕 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찾은 소조 천부상, 악귀상, 승려상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제석사의 화재와 재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무왕의 왕권 강화에 관련된 이야기도 알 수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 서쪽 2.3km 오금산의 남쪽 구릉 위에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불리는 2기의 고분이 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로 백제의 왕릉으로 평가되었는데요. 인골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한 무왕의 무덤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왕릉의 봉토 동쪽 절개면의 실제 토층을 전시해 놓아 성벽이나 대형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때 필요한 치밀한 판축 기술을 볼 수도 있습니다.

대왕릉 봉문 속 돌방은 백제 왕릉의 격을 갖추었고 돌방 안에서 수습한 나무널의 소재와 모양은 고귀한 백제인이 주인공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제는 비록 1,400년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막성 전투(602)를 시작으로 60여 년간 대신라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국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위덕왕~무왕대의 지방지배 강화와 국가 체제의 정비가 있었다고 해요. 율령을 시행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군과 성 단위의 하위 행정구역을 두었으며 관등을 가진 중앙정부 관료를 파견했습니다. 인력, 조세,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의 머리 부분은 어느 시점엔가 훼손되었는데 현재는 시대 불명의 불두가 올려져 있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영상으로 6~7세기 백제의 미감을 잘 간직한 제1안과 제2안, 제3안의 석불의 미소 복원안을 교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태안 마애삼존불입상, 부여 구교리사지 출토 소조 불상, 익산 제석사지 폐기장 출토 소조 천부상, 중국 양나라의 석조여래사, 일본 호류지 소장 금동삼존불입상 등을 참고하여 복원안을 그려냈다고 합니다.


백제의 최대 사원, 미륵사

조선 초 성리학자 김종직은 익산 미륵사 석탑을 미륵산의 위용을 능가하는 석탑이라도 망국의 유산일 뿐 부질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을 수리하던 2009년에 탑의 한가운데를 떠받치던 받침돌 안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그릇과 문자 기록이 발견되면서 백제사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무대로 떠올랐습니다.

 

왕궁리 유적에서 북서쪽으로 5km 남짓 떨어진 익산 금마면 미륵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는 7세기 전반 무왕 때 세워졌습니다. 백제에서 가장 크고 독특한 절로 탑과 금당을 기본 단위로 하는 세 개의 예배 공간이 나란히 늘어서 동원, 중원, 서원 ‘3원 가람’이라고 부릅니다. 미륵사는 목조건축물과 목탑으로 먼저 세워졌으나 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지금은 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습니다.

미륵사지 곳곳에서 치미 조각이 900점 넘게 출토되었는데요. 지붕 위를 장식하던 치미는 몸통에는 무늬가 없으며 바닥에 지붕의 용마루와 연결되는 수평선을 그어 장식했습니다. 날개가 크고 바닥이 넓어 안정적인 형태로 미륵사 치미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백제는 4세기 무렵부터 왕궁이나 불교 사찰 등 나라의 주요 시설을 지을 때 지붕에 기와를 얹었습니다. 기와를 만드는 장인은 특히 중요한 기술자로 와박사라 불렸습니다.

미륵사 중원에 세워졌던 목탑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진 백제의 건축 기술로 완성된 것으로 백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었다고 합니다.

사라진 목탑 좌우에는 석탑이 있었는데요.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의 서쪽, 서원 석탑이랍니다. 미륵사의 장인들은 가까운 미륵산에서 캐낸 단단한 화강암으로 오래가는 석탑을 만들어 냈습니다. 미륵사 석탑은 돌로 지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탑이랍니다. 미륵사 이후 우리나라 사찰의 탑은 대부분 돌로 지었는데요. 미륵사는 탑의 재료가 나무에서 돌로 변화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2009년 석탑의 해체 때 석탑의 중심축인 심주석을 들어 올리자 네모난 구멍이 드러났는데 안에서 온갖 보물과 함께 이곳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신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사리장엄과 금동제사리외호, 유리구슬, 금구슬, 자수정을 담은 작은 호가 더 묻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리봉영기(얇은 금판)에는 앞면 99자, 뒷면 94자의 글자를 가득 새길 수 있었는데 미륵사를 세운 왕비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초록색 유리구슬과 유리판 위의 청동합 5개, 사리공 등에는 귀한 무역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상당한 권력과 재력 없이는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이어서 공양자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7세기 전반 처음 세워진 이래 1,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 법당을 이어온 미륵사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는 불상은 없고 흙으로 빚은 여래의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무왕의 죽음 이후, 백제의 국력은 기울고 삼국은 통일되었는데요. 고려 시대까지 미륵사는 이 지역의 중심 사찰로서 세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했었다고 해요.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미륵사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곳을 지나던 문인들의 시구에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익산, 전북 서북부의 역사와 문화

‘익산’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때 처음 등장했는데요. 박물관이 위치한 금마면 일대는 옛 익산의 중심지였습니다. 북쪽과 남쪽으로 만경강과 금강, 서쪽으로 서해를 두르고 있어 강과 바다를 기점으로 내륙과 산간 지역을 연결하는 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습니다.

조선의 책과 지도에서는 풍요롭던 옛 익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다와 내륙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청자는 수상 운송의 발달과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물을 보면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발전한 금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입점리 고분군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고분에 묻힌 인물은 백제와 연결된 고위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강 하구의 중요성을 짐작게 합니다. 백제 한성기 말부터 웅진기 초에 전북지역이 백제로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모양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토기는 지난 1만 년 동안 전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나 생활필수품으로 사용됐습니다. 서로 수준과 성격이 다른 사회에서 토기 제작 기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응용되어 토기를 만들었는데요. 다양한 용도와 맥락으로 쓰인 토기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어 고대의 블랙박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토기를 보면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상설전시실 옆에는 디지털 실감 영상관도 있었는데요. 1966년부터 시작된 미륵사 발굴 조사와 보수 정비를 하며 그동안 미륵사지와 함께한 수많은 연구진의 땀과 노력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익산의 유적과 유물을 상설전시실에서 만나면서 백제인이 남기고 간 역사의 발자취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는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수한 문화는 오래도록 기억될 정도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새롭게 해석된 사실도 무척 흥미로워 오래된 역사로서의 백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온 이야기같이 친밀감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시간의 다리를 건너 백제의 역사 속으로 여행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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